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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MAR. WINTER 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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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가. 동시에 음악 덕후이며 NFT 컬렉터. 밤마다 음악디깅일기를 쓰는 밑미 리추얼 메이커. 곁에 둘 수 있는 미술로 일상 속 이너피스를 채워간다. 여자친구 <Truly Love>, 유키카 <Insomnia>, 박지훈 <Tomorrow> 등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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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원더랜드
오랫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고 잠시 쉬어가고 싶던 삶의 구간이 있었습니다. 2017년 11월, 막 겨울이 오기 전이었어요. 그리고 전 상상이 가는 국내의 시린 겨울을 피해 따스한 햇볕과 바람을 쐬고 싶던 마음이 매우 간절했죠. 그 간단한 이유로 인해 정반대의 날씨를 찾아 떠난 곳은 바로 호주였습니다. 도착하니 게으른 봄기운과 여름의 이른 더위가 그럭저럭 어우러진 날씨였어요. 그리고 그곳으로 전 혼자가 아닌 두 명의 여인들과 함께 짐가방을 들고 떠났습니다. 두 여인은 바로 저의 어머니와 시어머니입니다. (그리고 전 두 분을 모두 ‘엄마’라고 호명합니다.) 그렇게 세 여인은 봄의 끝자락인 시드니에서 짧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7일 동안 마치 동기처럼 하루하루를 즐겼습니다.
겉에서 보면 다소 당황스러운 조합입니다. 모녀는 그렇다 쳐도, 고부와 사돈이라는 복잡 미묘한 관계로 이뤄진 이 여인들의 마지막 숙소가 룩스 지구에 위치한 도미토리형 호스텔이었다고 말하면 주변에선 더 당황했어요. 로비에 들어서니 엄마들의 나이에 비해 훨씬 어린 배낭여행객들이 체크인을 하고 있었고, 드넓은 라운지 옆으론 구획이 잘 나누어져 있는 오픈 키친과 요리를 하는 투숙객들, 물품 사물함 등이 보였습니다. 열쇠를 챙겨 올라간 방에는 소박하지만 깔끔하게 정돈된 상태의 이층 침대 2개와 작은 욕실, 그리고 개인 사물함과 바다가 보이는 작은 창이 있었어요. 우린 동시에 외쳤어요. “수학여행 같다!” 정말 의외의 숙소 선택이지 않나요? 배경은 이랬어요. 여행을 계획하는 저에게 엄마들은 작은 꿈을 읊조리셨습니다. ‘만일 너와 함께 간다면 감히 엄두 내지 못 할 배낭여행을 해보고 싶어. 정해진 동선에 맞춰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며 구경하는 투어가 아닌 직접 속하여 경험하는 모험 같은 여행 말이야. 너의 젊음이 왠지 부럽구나.’ 이 세 마디에 전 6년만의 휴가를 두 여인과 함께 떠날 결심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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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는 비교적 이른 시간 상점들이 문을 열고 닫는 도시였어요. 괜히 낯선 도시에서 식당을 찾아 방황하는 것은 싫었고, 위가 약한 어른들이 7일 동안 삼시 세끼 서양식으로 먹는 건 무리였기에 점심을 제외한 아침과 저녁은 늘 숙소에서 직접 요리해 먹었습니다. 앳된 초록으로 넘실거리는 아름다운 항구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금세 오후가 찾아왔어요. 여인들은 숙소 근처 마트에 꼭 들러 신선하고 이국적인 재료들과 와인 한 병을 장을 보는 것이 참 소소한 행복이었다고 지금도 얘기 나눠요. 각자만의 방식으로 하루의 여독을 풀기. 1층으로 내려가 조리 도구를 다 갖춘 쾌적한 오픈 키친에서 요리하기. 이름 모를 와인을 한 잔 곁들인 근사한 만찬을 즐기는 이 모든 것이 루틴이었어요. 또 다음 날이면 간단히 구운 토스트, 몇 가지 과일과 요거트, 그리고 진하게 내린 커피를 들고 루프탑 테이블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그날의 행선지를 정하는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했습니다. 무엇보다 항구와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전망을 가진 옥상이었기에 여전히 쌀쌀한 새벽 바람마저도 참아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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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호주의 날씨를 즐길 수 있던 루프탑 테이블 ⓒ고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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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금세 흘렀고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을 보고 오니 시드니를 떠나기 전 마지막 하루가 남아있었습니다. 여행은 늘 찰나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아직 못 가본 다양한 랜드마크들을 짤막하게 둘러보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그건 왠지 끌리는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늘 왔다 갔다 하며 마주친 항구 근처에 아르데코 양식의 웅장한 미술관이 기억난 저는 아침을 먹다 말고 숙소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시드니 현대 미술관 홈페이지로 들어가 보았어요. 그리고 Hilarie Mais의 개인전과 Pipilotti Rist의 전시가 예정된 그곳에서 마지막 날의 오전 오후 일정을 모두 보내기로 마음먹었죠. 현대 미술은 조금 난해할까라는 우려는 금방 접었어요. 여행 초반 엄마들이 원했던 모험 같은 여행에 어울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거든요. 돌이켜보면 세 여인은 성격이 모두 달랐지만 미술과 음악을 사랑하는 하나의 큰 공통점이 있었고 그들은 고민 없이 미술관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행 중 가장 선명하고 깊은 여운을 느꼈고 아마 또 세 여인이 여행을 간다면 주저없이 미술관으로 걸어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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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호주의 날씨를 즐길 수 있던 루프탑 테이블 ⓒ고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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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pilotti Rist의 비디오 아트 전시 <Sip My Ocean>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캄캄한 조도 속 설치된 시청각 예술을 누워서 관람 중인 사람들도 보이니 세 여인은 잠시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을 느꼈어요. 발을 들여놓은 순간 그들은 이미 전시에 포함되었고 몰입한 것 같아요. 인접한 벽에 두 개의 거울 반사로 투영된 비디오에서는 채도가 높은 색감으로 만화경 전망이 환각처럼 흘러나왔어요. 이 작가의 다양한 설치 전시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전경이었습니다. 나른하고 목가적인 분위기의 수중 낙원을 부유하는 여인과 산호초의 이미지로 관객을 유혹하는 <My Ocean>과 전자음 트랙을 따라 하늘색 원피스와 빨강 구두를 신은 여인이 자동차의 창문을 망치로 깨부수는 동시에 반대 벽에서는 몽환적으로 흔들리는 꽃의 이미지가 보이는 <Ever is over all>. 여성성의 요염함과 분노, 묘한 히스테리함, 그리고 모두가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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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pilotti Rist의 비디오 아트 전시 전경 ⓒ고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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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듯 모를 듯한 이 매력적인 영상이 던지는 난해한 파동에 몰두한 채 세 여인은 철퍼덕 바닥에 앉아버렸고 저마다의 도발적인 해석을 곁들이며 한참 동안 일어서지 않았지요. 자리 앞쪽에 아른거리는 두 돌 정도의 아이의 조그마한 금발 머리를 쓰다듬으며 계속하여 속닥거리는 엄마의 실루엣이 기억납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며 두 여인은 우리가 저 어린아이처럼 너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경청하고 있으니, 아주 주객전도되었구나 라며 키득거린 것도 선명하네요. 그때가 아니었을까요. 여행 내내 엄마들을 들뜨게 했던 해방감과 자유로움이 가장 증폭되는 순간이요. 낯선 도시에서 생경한 미술을 접하며 타자가 아닌 주체가 되어가는 느낌, 안도감과 동시에 함께 속하여 경험하는 예술이 불러일으키는 진한 감동 같은 게 몰려왔고. 세 여인 모두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신선한 감정을 공유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전시에서 빠져나온 세 여인은 미술관 3층 테라스 카페테리아에 앉아 맥주와 커피를 홀짝이며(sip) 오후 내내 지난 여행의 풍경과 미술의 감동을 공감하며 대화했고 오랫동안 여운을 즐겼어요.
아무런 준비나 예습 없이 덜컥 작품을 마주했지만 그렇기에 세 여인은 토끼따라 굴에 빠진 앨리스가 되어 이상한 나라를 여행하고 왔을지도 모르겠어요. 덕분에 다시 원더랜드를 다녀온 기분으로 쉬지 않고 이 편지를 적어내려갑니다. 간혹 그 때 비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배경 음악인 Chris Issac의 ‘Wiked Game’을 들으면 저절로 그 순간으로 소환되는 기분인데요. 코로나 이후 여행에 대한 짙은 향수가 필요할 때마다 그 곡을 틀곤 합니다. 이 편지를 읽는 분들에게도 선물하고 싶어 음악 링크를 동봉해요. 얼은 땅이 녹고 새싹이 돋아나는 봄이면 봄마다, 잠들었던 향기로운 낭만을 깨우고 싶잖아요. 저에겐 두 여인과 함께 공유한 그 미술의 경험이 향기 짙은 낭만이었습니다. 이번 봄에 내 기억 속 미술에 대한 세세한 기억을 되짚거나 또는, 누군가와 미술관을 거닐며 각자만의 향기로운 낭만을 깨우길 바랄게요. 봄은 늘 그런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짧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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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your wonderful spring.
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시나요? 겨울에서 출발해 봄으로 되돌아오는 도돌이표 속에서 계절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네요. 이번 봄편지 Editor's Letter에서는 김애란 소설가의 『잊기 좋은 이름』이라는 책을 소개하고 싶어요. 저는 소설가가 쓴 산문집을 참 좋아합니다. 소설 속 인물을 빌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아서요. 『잊기 좋은 이름』에서는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언젠가 두보가 쓴 「곡강」을 두고 학생들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단순히 '꽃잎이 떨어진다'라고 생각하는 삶과 그렇게 떨어지는 꽃잎 때문에 '봄이 깎인다'라고 이해하는 삶은 다르다고. 문학은 우리에게 하나의 봄이 아닌 여러 개의 봄을 만들어주며 이 세계를 더 풍요롭게 감각할 수 있게 해준다."
김애란 소설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줬을 이 이야기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배웠습니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보는 사람들, 저는 예술가들에게서도 같은 것을 배웁니다. 이 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느낄 수 있는 시선을요. 단 한 번뿐인 올해의 봄에도 예술가들의 시선을 부지런히 쫓아가보려고 합니다. 스쳐 지나가기 쉬운 봄의 작은 기쁨들을 놓치지 않고 누리면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봄편지를 읽고 계신 여러분에게도 예술가의 시선이 닿아 기쁨 가득한 삶이 당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꽃잎이 떨어진다'라는 삶에서 떨어지는 꽃잎 때문에 '봄이 깎인다'라는 삶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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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LECTORS.] #01 TDA house 대표 김시내의 집
컬렉터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소장한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 한 사람의 성격과 가치관, 인생을 미루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장 이우환, 김환기부터 동시대 작가 모모킴의 작품까지 다양한 예술과 함께 살아가는 TDA house 김시내 대표. 과연 어떤 라이프 스타일을 가지고 있을까요?
- just paper 1주년을 기념하여 쓰는 편지
just paper는 흘러가는 삶의 모든 순간에 미술이 있기를 바라며 만들었습니다. 작년 2월에 1호를 발행하였으니 꼬박 1년째가 되었네요. 꽃잎처럼 흩날리는 붓 터치가 매력적인 베르트 모리조부터 모네, 고흐, 고갱, 르누아르가 함께 했습니다. 동시대 현장에서 사랑받는 청신, 허명욱, 배세진도 소개할 수 있었고요. 매월 새로운 그림을 보내며 당신의 안부를 묻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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