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세계 속에서도 일상을 발견하고, 그림으로 기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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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JUNE 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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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 첫 번째 P.S.는 잘 받아보셨나요? 저희의 이름으로 처음 보내는 편지이다 보니, 보내고 나서도 괜스레 마음을 졸였습니다. 이런저런 설렘과 걱정들로 전전긍긍해 하던 와중, 어느 구독자분께 답장을 받고선 마음이 환해졌지요. 외딴 섬에 홀로 떨어져, 어디로 닿을지 모를 신호를 보내고 있던 중 텔레파시를 받은 것만 같았달까요? 역시 진심을 알아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기쁜 일이라는 걸 다시 한번 체감했습니다.
이번 P.S에선 무너진 세계 속에서도 일상을 발견하고, 이를 그림으로 기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편지의 끝자락에는 오는 6월 공개될 엽서집 소식을 실어두었습니다. 저희는 언제나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테니, 하루 중 빈 틈이 생길 때 언제든 꺼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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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은 평소 자주 쓰게 되는 단어가 있나요?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애용하는 편입니다. ‘비록 사실은 그러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라는 뜻처럼, 앞에 어떤 문장이 와도 이를 전복 시킬 수 있는 힘이 느껴진달까요.
그렇지만, 요즘따라 ‘이런 시대 속에서도 이 말이 지닌 힘이 통할까?’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죠. 지구 어딘가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을 텐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맞는건가 싶어 자꾸만 주춤거리게 됩니다. 제가 허울 좋은 이야기들로 지면을 낭비하고 있을 때, 어떤 이는 급하게 짐을 꾸려 고향을 떠나기 전 사랑하는 가족에게 전할 마지막 편지를 적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에 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하는 편지는 너무나도 막연하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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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게니 소노브스키의 SNS에 올라온 마리우폴에서 발견된 8살 소년의 일기장 ⓒ에브게니 소노브스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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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우크라이나의 마리우폴에 살던 사진작가가 SNS에 사진 한 장을 올렸습니다. 어둠 속에서 촛불 하나로 버티고 있는 한 아이의 사진과 그의 그림일기였지요. 일기장에는 불타는 건물과 총을 든 군인을 피해 대피하는 그림들로 가득했습니다. 아이가 서투르게 그려낸 세상은 그야말로 참혹했고, 그 어떤 사진들보다도 훨씬 더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 일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8살 아이다운 일상이 담긴 페이지입니다. 아이는 폭격 당한 도시에 대해 말하다가도 새로 사귄 친구에게 꿀을 받은 이야기나 생일을 기다리는 마음을 적어내려갔습니다. 얼마 뒤 있을 자신의 생일 잔치에 친구들을 불러모을 수 있기를 꿈꾸며 상상화를 그리기도 했지요. 사람들은 암담한 그림과 나란히 놓인 천진한 장면을 보며, 전쟁 곁에 일상의 순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생경함을 느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아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처럼 여겨졌습니다.
물론, 이러한 풍경을 기록한 어른도 있었지요. 우크라이나의 그림책 작가 올가 그레벤니크는 자신이 겪고 있는 급박한 나날들을 그려 sns에 공유하였습니다. 그 꾸준한 기록은 <전쟁일기>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출간되었습니다. 전쟁 초반, 올가는 믿기 힘든 현실과 거리를 두기 위해선 무던히 빈 여백을 채워야만 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도 두려움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책 속 그림들은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전부 다 이야기 해주지 않습니다. 노트 위를 가로지르는 다급한 선만이 일촉즉발의 순간을 지나왔음을 암시할 뿐입니다. 작가가 머물렀던 환경은 그림 하나를 제대로 완성하기 조차 힘들 만큼 열악했습니다. 그간 풍부한 색채로 세상을 표현하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온 올가에게 남은 것은 급히 챙겨온 연필 몇 자루와 노트가 전부였습니다. 사이렌이 울리고, 폭격을 피해 지하실로 대피하는 와중에도 올가는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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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일기> 속 그림 / 두 아이와 전쟁터가 된 우크라이나를 떠나는 모습 ⓒ이야기장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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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주변을 면밀히 관찰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거치며, 알고 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장면들을 마주하게 되기도 합니다. 작가는 험난한 여정 속에서도 총성 아래 묻혀있던 삶의 풍경들을 발견해냈습니다. 긴장을 늦추지 못한 채 불면의 밤을 보내던 와중, 어렵게 구해온 새 침대에서 푹 잤던 날이나 샤워를 하고나서 좋아하는 향수를 뿌리며 희망에 대해 떠올렸던 시간들 또한 빠짐없이 기록해두었죠. 그런 장면들은 유독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오래 들여다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작가가 노트 위에 되살려낸 평온했던 순간들을 보며 ‘평화’는 생각보다 거창한 단어가 아니었음을 새삼스레 깨달았죠.
사랑하는 남편과 생이별을 해야만 했던 올가는 그와의 보냈던 마지막 하루를 그림으로 남겨두었습니다. 그의 자녀들은 지하실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함께 벽에 평화라는 글자를 새겨넣었습니다. 사라져가는 오늘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기록하는 이들의 몸짓을 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자세를 다시금 배웠습니다.
때로는 무너진 세계 속에서 펜을 쥐고, 붓을 놀리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싶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혼란스럽고도 무기력한 건너오며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비록 몇 점의 그림이 세상을 구하지 못할 거란걸 알고 있지만, 이에 체념하기보단 혼신의 힘을 다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렇게 일상을 기록하다보면 좀 더 나은 내일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이 솟아났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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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 마음을 보내주신 김선우 작가님의 작업 사진 ⓒ김선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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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던 <전쟁일기>의 번역가는 ‘옮긴이의 말’에서 자신이 존경하는 러시아 기자님의 말을 인용합니다. 그는 “작은 한 사람의 재능과 노력으로라도 반드시 서로를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최근 들어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실천 중입니다. 거리로 나가 작은 음악회를 열고, 기도하듯 춤을 추고, 캔버스 앞에 앉아 목소리를 담는 일. 일상 속에서 최선을 다해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한 사람이 불러오고 있을 작은 평화를 떠올리게 됩니다.
오늘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이것이 다입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담긴 편지가 모두의 내일에 닿을 수 있길 바라며 최선을 다해 적어보았습니다.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에게 주어진 일상을 충분히 누릴 수 있기를. 그 자리에서 피어오를 평화의 기미를 감히 믿어보고 싶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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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ce of peace 엽서 작품이미지 (왼)김선우 (오)윤형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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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조각들이 모여 평화를 이루다 ,우크라이나 평화 기원 엽서집 <piece of peace>
오는 6월 말, 15인의 작가가 참여한 <piece of peace>가 공개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무탈히 제자리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을 작은 엽서에 담아냈습니다. 프로젝트의 수익금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일상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전액 기부될 예정입니다. 마음을 보태고 싶으신 분들께서는 아래 링크에 접속하여 살짝 귀띔 주세요. 출시 당일, 남겨주신 연락처로 구매 링크를 전달 드릴게요.
참여 작가 l 김선우, 김제언, 김준성, 문승연, 박상혁, 우인영, 우지현, 윤형택, 이건우, 이소연, 이우연, 임솔지, 주유진, 청신, 최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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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오은재 DESIGNER 제민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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