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님은 어떤 순간에 용기가 생기나요? 이상하게 그날따라 대담해져서 결과와 상관없이 저지르고 싶은 때가 있나요? 저는 여행할 때 평소보다 훨씬 큰 용기를 가진 사람이 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여행에서 미술관을 다닐 때 더 그렇게 돼요.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종종 말을 걸곤합니다. 미술관에 모인 사람들은 열린 마음으로 무언가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제가 뭘 해도 다 괜찮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막 솟아나요.
고객님도 미술관에 가서 작품이 아닌 사람을 관찰해 본 적 있을걸요? 작품을 멍 때리며 보다가 도무지 무슨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가 되지 않아 그냥 지나치려는데, 작품 앞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을 봤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는 이유가 궁금해서 힐끔거리지 않겠어요? 또 넓은 전시장을 돌아다니다 지쳐서 의자에 주저앉았을 때. 그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시선이 옮겨가죠. 미술관에 간다는 건 결국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걸 보러 가는 것 같아요. 사람, 작품, 공간 다 구경거리죠. 오늘은 그중에 ‘미술관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게요.
평소에는 미술관 안 사람들에게 슬며시 눈길만 줬지 말 걸 생각을 안 해요. 근데 여행을 가면 그렇게 말을 걸고 싶더라고요. 완전한 타인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저는 어쩌다 여행지 속 미술관에서 수다쟁이가 됐을까요? 그 기원을 찾으려면 5년 전,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처음 간 해외여행이었습니다. 런던 테이트 모던을 갔어요. 건물이 어마어마하게 넓고 기획전뿐만 아니라 상설전까지 규모가 대단하더라고요. 상설 전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어떤 어두운 방안에 들어갔어요. 커다란 캔버스에 붉은색을 가득 채운 그림이 사방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땐 미술을 좋아했지만 작가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죠. 누구 그림인지는 모르고 단지 컴컴해서 긴장했던 것 같습니다. 방 중앙에 널찍한 의자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았길래 저도 한자리 차지했습니다. 조용히 작품을 바라보던 와중에 갑자기 옆사람이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면서 말을 거는 거예요!
당황했죠. 모르는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내 감상을 묻다니. 그것도 영어로… 잠깐 멍 때리다 뭐라도 대답해야겠다는 생각에 정신을 똑바로 차렸습니다. 처음에는 검붉은 색이 사방을 감싸고 있어서 무서웠지만 사람들과 모여 앉아 가만 보고 있으니 그 색이 점점 제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차분해지고 울적해졌어요. 그렇게 말했죠. “좀 슬프다”라고.
대화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거긴 테이트 모던의 ‘마크 로스코 룸’이었습니다. 그 뒤로 종종 로스코 그림을 만났지만 전 아직도 그때 본 작품이 제일 인상 깊네요. 작품 앞에서 울적해지는 일은 생각보다 감미로워요. 사람이 아니라 고정된 뭔가가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고 생각하면 설레는 거죠. 게다가 그 감정은 낯선 사람 덕분에 더 선명해졌어요. 왜, 말로 꺼냈을 때 확실해지는 감정이 있잖아요.
그때부터 시작됐던 것 같아요. 여행을 다니며 미술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열심히 말을 걸고 다녔어요. 많은 사람들이 떠오르는데.. 몇 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드릴게요.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 분은 바젤 바이엘러 파운데이션에서 만났습니다. 저는 독일 작가인 ‘게르하르 리히터’를 정말 좋아하는데, 마침 리히터 작품이 거기 있더라고요! 12개의 유리가 다양한 각도로 겹쳐진 설치 작품 하나와 극사실적 풍경사진화가 함께 있는 방이었습니다. 넋 놓고 보는 저와 똑같이 방에 오래 머무는 할머니가 있었어요. 그분이랑 대화를 나누게 됐죠. 알고 보니 오빠 되시는 분이 한국전쟁 당시 참전하셨고 68주년을 기념해서 한국에 곧 방문하신다는 겁니다. 정말 신기하지 않나요? 소중한 추억이 될 것 같아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 앞에 서도록 부탁드리고 사진을 남겼습니다.
여기는 2018년 뮌헨의 알테 피나코텍입니다. 르네상스 작품들 앞으로 귀여운 멜빵 사나이가 열심히 뭔가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에게 말을 걸게 된 건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서입니다. 한 방에 열 명 넘는 어르신들이 도슨트를 경청하고 계신 모습을 발견한 때였죠. 그 모습이 대단해 뒤쪽에서 멀찍이 바라보았습니다. 설명이 끝나자 하나 둘 흩어졌는데요. 유독 한 사람이 간이 의자에서 일어날 생각을 안 하고 부지런히 노트 위로 손을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대체 뭘 저렇게 그리는지 궁금했어요. 한참을 혼자 바쁘다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시기에 슬쩍 다가가 물었습니다. 뭔가를 그리셨던 거였는데, 그게 뭔지는 이제 오래돼서 기억이 나지 않네요. 아마 작품 스케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에게 노트와 팬을 넘겨주시는 겁니다! 당황했더니 자신을 그려달라고 하시더군요. 엉성한 그림을 넘겨드리며 “저도 그려주세요.” 해버렸습니다. 하하.. 적잖아 당황하시더니 (먼저 그려달라고 하시고는!) 슥슥 그려주셨죠. 그게 바로 오른쪽 그림입니다. 2018년 뮌헨에서의 저.
정말 근사한 에피소드 아닌가요. 용기 내어 말 걸지 않았다면 이런 좋은 추억은 없었겠죠. 여행을 가면, 특히 미술관에만 가면 이렇게 용기 있어지더라고요. 미술관에서 만난 사람은 말씀드린 것보다 훨씬 많아서 더 말하고 싶지만 글이 길어지니 이만 줄일게요. 대신 고객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고객님은는 어디서 용기가 생기나요? 그런 순간을 알려주세요. 아니면, 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주면 좋겠어요. 기다릴게요. 꼭 답장 남겨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