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확실히 다른 방식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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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혜 Jihye Yoo
독자와 비밀 만들기를 좋아한다. 수필로 이뤄진 네 권의 책을 썼다. 여행 혹은 여행 아닌 곳에서 '유지혜 페이퍼'라는 이름의 메일링 서비스를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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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만난 ( 시간 )
바버라와 다이앤. 내가 그들을 만난 것은 모마(뉴욕 현대미술관) 안뜰에서였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곳이 맞아요. 둥실거리는 칼더 작품이 설치된, 인공 연못과 검은색 벤치 사이 수채화 빛 나무가 보이는, 미술관 건물 어디서든 내려다볼 수 있는 정원이요. 사진을 좀 찍어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하다가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몇십 년째 뉴욕에 살고 있으며, 주말마다 미술관으로 자원봉사를 나온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내 예상보다 무척 친절했습니다. 그러나 뉴요커 특유의 넉살은 서둘러 사라집니다. <it was nice to meeting you 만나서 반가웠어요> 와 <Have a nice day 좋은 하루 보내요>가 오가는 동시에 만남은 미련 없이 종료됩니다. 물론 우리는 전화번호도 교환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만나자는 입바른 약속이 없는 것은 내가 뉴욕에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카메라에 한마디만 해 달라는 내 말에 다이앤은 사랑스럽게 멋쩍어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웰컴 투 모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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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뉴욕. 모마에서 만난 바버라, 다이앤과 이야기를 나누는 유지혜 ©유지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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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미술관 건물로 들어섭니다. 커다란 시집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 듭니다. 시집처럼 넉넉한 여백에 고집스런 회화적 언어들이 작품처럼 걸려 있습니다. 난해하고 우아한 시적인 분위기 속에 구두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일상과 동떨어진 장소는 이전의 세계를 잊게 만드는 전환을 약속합니다. 미술관에 입장하는 순간 거리는 잊힙니다. 현실과 환상이 자리를 바꿔 앉습니다. 나는 뭔가 다르게 행동해야 할 것 같은 충동을 느낍니다. 미술관은 내게 설득하는 듯합니다. 쉬어갈 의자들을 놓아두고, 어수선함을 칭찬하며, 몰입을 나의 기질로 바꿔버리는 식으로요. 시간은 확실히 다른 방식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미술관은 비현실과 현실 사이 어딘가에 붕 떠 있는 안개 낀 장소입니다.
그 안개는 개개인의 고독한 흥분으로 만들어집니다. 조용히 감탄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자아와 일상을 잊은 채 관객의 입장에서 몰두해야 합니다. 이건 극장이나 콘서트를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곳에서의 관람은 넷플릭스처럼 일상에 걸쳐 있는 편리한 제도 밖으로 벗어납니다. 이를테면 잠시 멈추어 두었다가 화장실을 다녀오거나 보면서 손톱을 바르거나 통화를 할 수도 없습니다. 일상이 끼어들 틈 없는, 철저한 실시간의 예술.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시간을 구매하는데 길들여졌습니다. 딴짓을 하려고 시간을 사서 미루며 <지금>의 자리에 기꺼이 <다음>이라는 변명을 앉힙니다. 만회의 가능성에 중독된 대부분의 우리는 진정한 관람의 태도를 잊은 지 오래입니다. 미술관에는 셔터 소리가 가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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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파리. 쁘띠 팔레 미술관 지하의 기념품숍 ©유지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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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유로 기념품 숍 구경은 내게 제일 편하고 안전한 선택입니다. 미술관에서 사서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그래서 ‘다음’을 보장하는 유일한 것들이 그곳에서 판매되고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소비를 감상의 증거라고 착각할 만큼 어리석습니다. 복사된 예술품들을 찍어 만든 상품들은 소비에 의미를 제공하는듯 합니다. 10개 가격에 11개를 준다는 표지 때문에 꾸역꾸역 엽서를 고르는 건 그림 감상보다 더 중요한(혹은 더 친숙한) 의식에 가깝습니다. 계산 줄에 서 있는 동안 조지아 오키프 그림으로 만들어진 벽걸이 달력과 모마 뮤지엄 한정 출시 야구 모자, 피카소 그림으로 된 냉장고 자석, 고급스러운 삼색 티팟 세트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산 엽서들은 이때껏 모아 온 엽서 컬렉션에 들어가 낡아버릴 것임을. 나는 보내지지 않을 엽서가 초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삽니다. 소유는 물건의 본래 기능을 상실하게 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날아가야 한다는 편지 본연의 쓸모 말이에요. 감상이 목적인 장소에 와서까지 소비자의 정체성을 버리지 못하는 건 어쩐지 피로하고 절망적입니다. 그리고 기념품 숍을 구경하는 일은 왜인지 늘 시간이 모자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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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전시관에 입성합니다. 나는 농담조로 천장에 매달려 있는 거대한 철심 조각품에 뒤통수를 살짝 부딪칠 뻔한 친구에게 말합니다. “야, 조심해. 그거 아마 이백억쯤 할 거 같으니까. 건들면 큰일 난다고.” 기념품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어떤 것도 챙겨 나갈 수 없습니다. 작품에는 가격표가 붙어있지 않습니다. 가끔 경매 행사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걸려 있는 작품들은 대중에 공개되었다는 점에서 당분간 모두의 것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장르의 탄생과 과정을 상징하기에 가격을 정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무나 바람에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것처럼요. 혹 가격이 있다 해도 비싸서 못 살 겁니다. 그래서 나는 뉴욕에서 매일 하는 그 한마디를 전시관에서만 하지 않습니다… “이거 얼마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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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런던. 캠든 아트 센터 2층에서 열린 전시, 눈으로 작품을 어루만지는 사람들 ©유지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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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수 없는 것을 눈으로 어루만지는 법을 배웁니다. 건강한 조급함과 함께 기억하고 느껴서 내밀히 저장하려 애써봅니다. 오랜만입니다. 소유하지 않고 감상만 하는 일. 언제일지도 모를 미래로 감탄과 기분을 미루던 습관에서 벗어나는 일. 무언가 내 가방에 담기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 무엇을 더 자주 잊곤 했습니다. 문득 떠올려 봅니다. 책 살 돈이 모자랐던 어린 시절, 서점에 매일 출근해 천 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완독했던 기억을요. 막상 값을 지불하고 그 소설책을 손에 쥐었을 때는, 글쎄요. 나는 행복했을까요? 과연 더 진지했을까요?
소비의 세대에 사는 우리는 ‘사다 buy’와 ‘살다 live’를 자주 헷갈립니다. 소유권이 생명력을, 진정한 감상을 보장한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가지려고 하는 순간 예술은 생명을 잃습니다. 가방에 넣는 순간 마음에서는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한 번뿐인 시간, 혹은 예술을 사는 법은 오직 다음을 기약하지 않는 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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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2022년 5월, 뉴욕 모마에서 유지혜의 모습 (우) 2021년 삼청동의 한 미술관 윤형근 전시에서 ©유지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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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간은 내게 모든 것이 너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잘 보고 간절히 기억하라고요. 비워지는 마음은 시원하고 가볍습니다. 나는 그렇게 매일 실천했던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벗어던집니다. 보는 것에 소홀하지 않는 관람객이 되기를 연습하다가 빈손으로 미술관을 빠져나옵니다. 출구로 향하는 관람객들의 어깨에는 무거운 카메라와 모마 로고가 박힌 쇼핑백만 들려있을 뿐, 오리지널 작품을 들고 있는 사람은 단연 아무도 없습니다. 미술관은 이토록 공평한 곳입니다. 그러나 각자의 가방 안에는 무형의 비명, 슬픔, 광기, 기쁨이 꽤나 무겁게 들어있을 것입니다. 내 호주머니에는 아까 구매한 엽서들이 들어 있습니다. 나는 다음 날 엽서를 써서 보내 버립니다. 편지는 바버라와 다이앤이 내게 했던 말처럼, 언제나 이렇게 마무리 지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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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하루 보내 Have a good d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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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베를린. 유지혜가 바라보고 그린 베를린 미술관 풍경 (Hamburger Bahnhof) ©유지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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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없습니다. 미술관의 시간은 그렇게 완성됩니다.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사라지는 뉴요커처럼 우리는 매번 마지막으로 만납니다. 그러나 이제는 끝과 시작이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때 제대로 만났던 사람, 그때 제대로 보았던 예술은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재회할 것임을 틀림없이 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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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미술관에서 만난 ( )
우리는 흔히 미술관을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이라 여깁니다. 내 맘을 뒤흔드는 무언가를 마주치길 기대하며 그곳으로 향합니다. 물론 그 무언가가 ‘작품’일 거라 장담할 순 없습니다. 수많은 명작과 여백 사이를 헤매던 도중, 우연히 시선이 멈춘 곳에서 큰 울림을 느낄 수도 있을 테니까요. 미술관에 간다는 건 결국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걸 보러 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번 ‘P.S 미술관에서 만난 ( )’ 시리즈에서는 미술관을 구석구석 느끼다가 의외의 장면 앞에 오래 서 있던 분들의 경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시선을 멀리 두고 공간을 넓게 둘러보세요. 사람, 작품, 공간 자체, 주변을 감싸는 자연... 전부 다 영감이 될 수 있답니다. 애정을 담아 한 발짝 다가서 본다면, 신경을 곤두세우고 감각해본다면 더욱 다채로운 경험을 하게 될 거예요.
#01 P.S 미술관에서 만난 (사람들), 전혜림 에디터
#02 P.S 미술관에서 만난 (바다), 오은재 에디터
#03 P.S 미술관에서 만난 (자연), 박선영
#04 P.S 미술관에서 만난 (표정), 오은
#05 P.S 미술관에서 만난 (음악), 김모아
#06 P.S 미술관에서 만난 (양눈잡이*), 박참새
#07 P.S 미술관에서 만난 (시선), 오은재, 전혜림 에디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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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예술, 이종원의 관찰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김건으로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배우 이종원에게 영화, 음악, 사진, 패션은 뭐 하나 빠질 수 없이 중요한 카테고리입니다. 그는 사진을 찍기 위해 세상을 세심히 관찰하기도 하지만 그를 둘러싼 예술에 대해 솔직하고 대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내면의 모습을 면밀히 들여다보죠. 프린트베이커리가 자신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배우 ‘이종원’의 일상예술에 대해 들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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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전혜림 DESIGNER 이혜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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