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님, 어제는 눈이 폴폴 날렸죠. 아직 사진처럼 예쁘게 쌓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리는 눈을 보니 연말이 실감 났습니다. 우리의 2022년. 일 년간 쌓아 올린 시간의 결을 어떻게 다시금 되짚어 볼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22년도 마지막 P.S 이니 한 해를 곱씹으며 돌아보는 시간을 선물하고 싶었거든요. 영감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얻었습니다. 허명욱 작가님의 개인전을 홍보하다가, 작가님의 작가노트를 발견하고는 이거다 싶었거든요.
그래서 이번 P.S는 허명욱 작가의 작가노트를 정리해서 발송 드립니다. 작가노트는 작업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을 담아낸 글입니다. 어떤 일에 몰두하고 지속한 사람이 쌓은 생각을 정리된 문장으로 엿들을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 같습니다.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요.
우리와 크게 동떨어진 것 같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작가들처럼 형체가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지는 않습니다만, 매일 조금씩 나만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내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작가들과 비슷합니다.
허명욱 작가는 매일 그날의 기운과 색을 담아 작업을 하고, 반복하고 모으고 쌓아서 자신을 거쳐간 모든 것을 그의 것으로 만듭니다. 어떻게 나를 스쳐 지난 것들이 다시 나로 되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요. 그리하여 모든 것을 아껴주고, 보듬어주어 품에 잘 안을 수 있을까요. 허명욱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고민해 보고 싶습니다.
겹겹이 쌓여 빛나는 색
허명욱의 작가 노트
[ 칠하다 ]
나에게 '칠하다'는 작업을 위한 행위 이전에, 매일 밥을 먹고 이를 닦고 잠을 자듯 평범한 일상의 그저 한 부분이다. 일상의 시간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휘발되어 날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오롯이 축적되어 세월을 만든다. 매일 반복되는 평면 위 칠이 오랜 시간을 겪어 묵직한 색과 두터운 표면으로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말이다. 중첩된 칠은 시간과 그 시간 안에 머물렀던 행위를 머금은 "조형적 덩어리"가 된다.
칠하는 허명욱
[ 그날의 색 ]
매일 아침 작업을 하기 전, 작업실 주변의 자연과 나 자신에게 귀 기울이며 오감에 집중한다. 바람이 지나가고 난 후 나뭇잎의 색이 변했다. 습기를 머금고 있는 작업실 공기도 코 끝으로 전해진다. 모든 것이 어제와는 달라졌다.
나만의 오감 에스키스를 하며 몸과 마음의 기운을 끌어모아 본다. 좋은 기운이 모이면 마음을 반듯하게 두려고 노력한다. 옛 선비들이 화선지 앞에서 번다한 마음을 없애고 첫 필력을 준비하는 자세가 이와 비슷했을까. 이 좋은 기운이 힘을 잃을까 조심히 붙잡아 두고 색이 떠오르면 “그날의 색”을 만든다. 평면 위에 토회를 발라 밑 작업을 하고, 그 위로는 수십 가지의 다른 색이 여러 번의 붓질을 통해 시간차를 두고 중첩된다. 칠하고 마르면 다음 색을 칠하기를 반복한다. 때론 쌓아 올린 색들 위로 과감하게 흑칠을 덮어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칠의 반복은 색의 결과물에서 매우 유의미하다. 옻칠의 특성상 맨 위의 색은 빛과 공기를 만나며 자연스레 피어나고, 아래 중첩된 색들은 서로 투명하게 겹쳐진 듯 시간이 흐를수록 스스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각각의 색들이 자신도 그 시간 안에 함께 있었노라 증명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날의 색을 표시한 숫자
[ 시간의 기록 - 시간의 무게 ]
그날의 색은 매번 배합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이 다시 만들기 어렵다. 그래서 적당한 크기의 메탈 스틱 위에 색과 날짜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색을 칠했던 "행위가 머무르는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칠과 건조가 반복적으로 진행된 약 4800일의 시간을 겪어 낸 수 십 개 색들을 옆으로 옆으로 엮는다. 나란히 놓인 색의 시간은 경계가 사라진다. 그들은 서로 연결되며 그저 흘러감으로 이해된다.
그날의 색과 시간을 담은 스틱들은 서로 연결되며 그저 흘러감으로 이해된다.
[ 일상 속 사물과 미적 유희 ]
나의 작업에서 반복되는 “시간이 지나간 흔적”을 품은 자연스러운 색과 표면에 대한 탐구는 평면 회화 작품에서만 구현되는 건 아니다. 테이블 웨어와 가구 제작으로 작업을 확장시킨 이유는, 미에 대한 감상적 유희가 꼭 순수미술 작품에서만 존재하는 숭고한 경험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예술이 우리 일상의 삶 속 전반에서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의 행위를 겪어 낸 나의 산물들이 전시장을 위한 작품이기보다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 안에서 공유되고 사용되길 바란다.
허명욱의 작업실
[ 행위가 머물렀던 시간의 축적 ]
반복적으로 칠을 올리는 나의 작업 과정에서는 조형적 행위가 머무르는 인위적 시간이 축적된다. 이것은 만물에 흐르는 자연의 시간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함께 존재한다. 서로 흡수되어 조형적 덩어리로 시각적 흔적을 남긴다. 이 덩어리는 시간을 또다시 겪어 내는 과정에서 부서지고 마모되고 결국에 흩어져 본래의 모습을 잃고 소멸한다. 세월 속에서 사물이 낡아서 사라지는 것도, 사람이 늙어 죽음으로 가는 과정도 같은 맥락이다.
탄생과 존재, 소멸은 사물도 사람도 겪어야 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현상에 대한 성찰과 사유의 시간은 우리의 삶 속에서 꼭 필요하다. 나에게 그 시간은 매일 색을 만들고 칠을 쌓는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