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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MAR. SPRING 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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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작가.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평일도 인생이니까>,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게 취미> 등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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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모든 처음 앞에서
요즘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 빠져 있습니다. ‘기억 조작 드라마’라는 수식이 과장은 아닌지, 보고 있으면 저에게도 마치 스무 살 무렵 저런 기억이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해요. 물론 극 중 희도(김태리)처럼 싱그러워본 기억도 없고, 원하는 것 앞에서 용기와 끈기도 늘 부족했던 것 같지만. 그럼에도 청춘이었다 말할 수 있는 한때를 꼽으라고 한다면, 처음으로 혼자 떠났던 배낭여행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익숙한 나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다른 내가 되는 상상을 자주 했던 시절. 아무도 나를 모르는 낯선 땅에서라면, 한 달이라는 정해진 시간 동안이라면, 다른 내가 되어 살아볼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세상을 믿는 얼굴로 환하게 웃고,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선선히 말을 걸고, 잠들며 내일을 낙관하는 그런 나로 말이에요.
그 시절의 많은 일들이 그렇듯. 맞닥뜨린 현실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낯선 곳에 가니 더 주눅이 들 뿐이었어요. 하지만 어떻게 모은 돈으로 떠나온 여행인데, 매일 아침 용기를 그러모아야 했습니다. 씩씩하게 걸어서 오늘 하기로 마음먹은 일들을 하나씩 해내고 밤마다 여행 노트에 동그라미를 치곤했지요.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고흐의 의자’ 그림을 보겠다는 건 미리 적어간 체크 리스트 중 하나였습니다. 2005년 무렵이었을 거예요. 그해 초여름에 출간된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읽고 창작자로서의 그에게 한창 매료되어 있었던 때입니다. 내셔널 갤러리에 들어서자마자, 손에 든 지도에 표시된 대로 그림이 걸려 있는 방으로 직진했습니다. 오직 이것을 보기 위해 런던에 온 사람처럼요. 그리고 그곳에서 마침내 만났지요. 담뱃대가 놓여 있는 고흐의 노란 의자를. 그 시절의 많은 일들이 그렇듯. 맞닥뜨린 현실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몰랐거든요. 그 그림 앞에서 내가 울게 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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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처음으로 본 원화였습니다. 두텁게 쌓인 물감 자국과 붓의 터치가 너무 생생해서 잠시 자리를 뜬 화가가 금방이라도 저 벽면의 코너를 돌아 나타날 것만 같았습니다. 십칠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감정을 어떤 언어로 옮겨야 할지 모르겠네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 대학에 진학하며 겨우 서울에 방 한 칸을 얻었고, 그때껏 제대로 된 문화생활을 누려본 적 없었던 제게 ‘원화’라는 세계가 처음 열린 거예요. 그림 앞에 선 제 앞으로 무언가가 파도처럼 덮쳐오는 기분이었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때까지 내가 그림을 본 방식이란, 책 속에 인쇄된 이미지 혹은 손바닥만 한 엽서, 더러 카페 벽면에 붙은 포스터 같은 걸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는 걸.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복제품일 뿐. 어떤 이미지를 갖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에 가까울 뿐. 그런데 그날 그곳에서 (세상 어딘가에 당연히 존재할 테지만)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없는 것처럼 여겼던 원본을, 진짜를 만난 겁니다. 마치 사진으로만 알고 있던 사람을 실제로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그것도 먼 과거부터 지금까지 살아 있는, 내가 가늠할 수 없는 세월을 몸에 새긴 불가해한 사람이 눈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았어요. 돌아보면 그때 저는 그림에 쌓인 그 시간에 압도되었던 것도 같습니다.
내셔널 갤러리 곳곳에는 어린이들이 흩어져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그림과 스케치북을 바삐 오가는 눈길로 원본을 따라 그리는 아이도 있었고, 지금의 마음을 표현한 듯 물감을 구름처럼 펴 바른 아이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아이들은 강가의 조약돌처럼 흩어져 앉아 윤슬처럼 빛나는 원화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망설임 없이, 질문도 없이, 자유롭게 무언가를 표현하면서요. 내가 이런 것을 보고 자랄 수 있었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나에게는 스물두 살이 되어서야 찾아온 ‘처음’이 저 친구들에게는 이르고도 자연스럽게 일상에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처음’이 얼마나 이르고 느린가는 중요한 게 아닐지 몰라요.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무수한 처음들이 우리를 어떻게 바꿔놓는지가 중요할지도요. 누구에게나 어떤 식으로든 ‘처음’이 생기고, 그 처음은 한 사람의 마음에 새로운 지도를 그립니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고, 난생처음 겪는 일이 생길 때마다 마음의 지형이 바뀌는 거지요. 새로운 능선이 생기고, 호수가 넓어지고, 없던 길이 열리고, 마침내 그리로 걸어갈 수 있게 되는 거예요.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길, 걸음을 뗄 때마다 내 세계를 넓혀주는 길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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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S A FIRST TIME FOR EVERYONE ⓒ김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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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배낭여행은 어떻게 되었냐고요? 그 후 남은 여행은 고흐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 되었습니다. 궁금했거든요. 나를 사로잡은 이 기분이 무엇인지, 이 기분이 나를 어디까지 데려 다 줄지. 파리에 머물 때는 오로지 고흐 미술관을 방문하기 위해 당일치기로 암스테르담에 다녀왔습니다. 공사로 일부 전시 공간의 관람이 제한되어 있었지만 그곳에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 들떠서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프랑스 남부를 여행하려던 계획은 아를에만 오래 머무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를은 고흐가 1888년부터 한 해 남짓 머물며 200여 점의 작품을 남긴 곳이죠. 그림을 그린 장소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고흐의 그림 표지판이 있는 위치에 발을 맞추어 서면 눈앞에 그림 속 풍경이 실제가 되어 펼쳐지곤 했습니다. 19세기 말의 고흐가 서성대며 거닐었을 골목길과 카페, 병원, 너른 밀밭을 걷는 동안, 바뀌지 않은 풍경 속에서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겹치는 듯해 조금 벅찬 심정이었던 게 기억납니다. 아를에서 보낸 일주일은 눈부셨던 태양의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세월이 기억을 미화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그건 분명 아름다운 햇살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남국의 햇살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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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저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매일 새로운 이유로 감탄하곤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잘 감탄하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된 시간이기도 했어요. 혼자서 떠난 첫 배낭여행이었고, 처음으로 원화를 보았고, 처음으로 그림 앞에서 울어보았으며, 처음으로 내 의지만으로 경로를 바꾸어 보았고, 처음 보는 햇살 아래를 걸었고, 처음으로 무언가를 깊숙이 마음에 들였던...... 그 무수한 처음의 시간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몰라요.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에게 어디 처음이 아닌 일이 있을까요.
그러고 보니, 요즘 왜 그 무렵의 내 나이를 가리키는 청춘 드라마에 속절없이 빠지게 되었는지도 알 것 같습니다. 삶에서 단 한 번만 가능한, 그 모든 ‘처음’을 떠올리게 해서인지도요. 서툴지만 순도 높은 진심이 있었던 시절. 지나온 시간의 나에게 손 흔드는 기분으로 드라마를 보고, 오래전 아를에서 찍은 사진을 봅니다. 거기의 너는 잘 지내니. 주눅 든 맘으로도 여전히 삶을 기대하니. 크게 웃는 날이 있는가 하면 길을 걷다 갑자기 울음이 터지는 날도 있니. 이 인사가 닿는다면 조금은 안심해도 좋아. 너는 무사히 서른이 되고 곧 마흔이 될 거니까. 그 모든 처음들을 징검돌처럼 하나씩 디디며 이 시간에 도착할 테니까. 무엇보다 청춘이 다 지나간 것만 같은 자리에도 삶에는 아직 너를 기다리는 ‘처음’들이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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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your wonderful spring.
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시나요? 겨울에서 출발해 봄으로 되돌아오는 도돌이표 속에서 계절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네요. 이번 봄편지 Editor's Letter에서는 김애란 소설가의 『잊기 좋은 이름』이라는 책을 소개하고 싶어요. 저는 소설가가 쓴 산문집을 참 좋아합니다. 소설 속 인물을 빌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아서요. 『잊기 좋은 이름』에서는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언젠가 두보가 쓴 「곡강」을 두고 학생들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단순히 '꽃잎이 떨어진다'라고 생각하는 삶과 그렇게 떨어지는 꽃잎 때문에 '봄이 깎인다'라고 이해하는 삶은 다르다고. 문학은 우리에게 하나의 봄이 아닌 여러 개의 봄을 만들어주며 이 세계를 더 풍요롭게 감각할 수 있게 해준다."
김애란 소설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줬을 이 이야기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배웠습니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보는 사람들, 저는 예술가들에게서도 같은 것을 배웁니다. 이 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느낄 수 있는 시선을요. 단 한 번뿐인 올해의 봄에도 예술가들의 시선을 부지런히 쫓아가보려고 합니다. 스쳐 지나가기 쉬운 봄의 작은 기쁨들을 놓치지 않고 누리면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봄편지를 읽고 계신 여러분에게도 예술가의 시선이 닿아 기쁨 가득한 삶이 당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꽃잎이 떨어진다'라는 삶에서 떨어지는 꽃잎 때문에 '봄이 깎인다'라는 삶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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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空間)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 되지만 대체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그림과 글로 따스한 위로를 전하는 우지현 작가는 자신만의 공간으로 ‘작업실’을 꼽았습니다. 하루에 열 시간 이상 홀로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합니다. 그 공간에서는 어떤 미묘한 마법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우지현의 공간 이야기를 들으며 공간, 그 곳에서 일어나는 현상 그리고 작가 우지현을 만나보세요.
박세윤은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가입니다. 네덜란드의 세계적인 건축사무소 OMA(Office for Metropolitan Architecture)의 촉망받던 건축가에서 뉴욕의 갤러리스트이자 조각가로 분야를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명확한 가치관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가는 박세윤은 어떤 미술 취향을 가지고 있을까요? 박세윤과 나누었던 내밀한 미술 취향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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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박세연 DESIGNER 제민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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