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저는 표정을 살피는 법을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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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Oh eun
시인. “이따금 쓰지만, 항상 쓴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살지만 이따금 살아 있다고 느낍니다.” ‘항상’의 세계 속에서 ‘이따금’의 출현을 기다린다. 마음을 잘 읽는 사람보다는 그것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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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만난 ( 표정 )
- 표정을 살피는 일
2013년의 끝과 2014년의 시작에 저는 뉴욕에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직장인이었어요. 회사에서 제공한 연말 휴가에 남은 휴가를 붙이면 열흘 정도 어디 다녀올 수 있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은 뉴욕이었어요. 왜 하필 뉴욕이었을까요? 아마 믿을 만한 사람이 일전에 제게 해주었던 말 때문일 겁니다. “은아, 너는 뉴욕이나 런던에 가면 심장이 터져버릴지도 몰라!” “왜, 형?” “너무 좋아서. 네가 좋아할 만한 게 그득한 도시야. 특정할 수는 없어도 너는 분명 그 도시를 사랑하게 될 거야!” 그의 말에 확신이 가득해서 저는 추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둘 중 한곳만 갈 수 있다면?” 그의 답변은 거침이 없었어요. “뉴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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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사랑하는 사람과 뉴욕에 갔어요. 지금은 그 사람과 헤어졌지만 사랑까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닙니다.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인 이유예요. 어느 순간, 사랑이 중단되었다고 느껴요. 다시 시작될 가능성은 아주 낮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 시기를 떠올리면 흐뭇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열흘 동안의 뉴욕 여행이 더없이 좋았기 때문이에요. 뉴욕에서 저는 많이 보고 듣고 무엇보다 뉴욕 곳곳을 아주 많이 걸었습니다. 뉴욕을 체득하는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요. 당시에 제게 걸음 수를 체크하는 스마트워치가 있었다면 매일매일 칭찬을 받았을 거예요.
애인과 저의 관심사 중 공통분모는 전시였어요. 자연스럽게 일정 중 상당수가 미술관과 박물관 방문으로 채워졌지요. 제 사진첩에 미술관 인근에서 찍은 사진이 가득한 이유이기도 해요. 여행을 하며 저희는 시시로 상대의 표정을 살폈어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음 주름의 결을 파악하는 시간, 혹시라도 불편한 것은 없는지 곰곰 헤아리는 시간,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며 다음을 궁리하는 시간 등 표정을 살피는 일은 누군가에게 한 발짝 다가가려는 움직임이자 안간힘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적극적으로 마음을 움직인다는 점에서, 이는 그림 감상과 맥을 같이합니다. 표정을 읽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림에게 말 걸기 위해서는 최대한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얼핏 가만한 듯 보이지만 속은 복잡할 대로 복잡해져 있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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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현대미술관에서 만난 마티스의 <춤(La Danse) 1>(1909) © 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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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둘째 날,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본 상설 전시와 특별 전시를 말하지 않을 수 없어요. 화집에서 보던 그림들이 거기에 모여 있었거든요. 파울 클레,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 호안 미로,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등 제 미술 산문집 『너랑 나랑 노랑』에 등장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보았던 날이기도 해요.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제 표정을 살피던 애인이 말했어요. “키즈카페에 온 어린이가 따로 없군.” 그 말조차 저를 자극하지 못했답니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지는 모르겠으나 심장 박동 수가 빨라지고 있음은 분명했거든요. 마티스의 <춤(La Danse) 1>(1909) 앞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는데, 춤추는 이의 표정과 몸짓에 깃든 사연 하나 하나를 짐작해보았어요. 진종일 뉴욕현대미술관에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뉴욕현대미술관은 제가 뉴욕에 머물렀을 때, 유일하게 두 번 찾은 곳이기도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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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현대미술관 관람권과 미술관 앞 풍경 © 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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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현대미술관에서는 때마침 바실리 칸딘스키와 르네 마그리트의 특별 전시가 열리고 있었어요. 칸딘스키가 1934년부터 1944년까지 파리에 머물렀을 때 그린 그림들, 마그리트가 1926년부터 1938년까지 낯익은 것들을 낯설게 만드는 작업에 몰두했을 때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고 있었는데, 그림을 마주할 때마다 심호흡을 해야 했습니다. 누군가의 한 시절을 훔쳐보는 일은 확실히 두근거리는 일이잖아요. 그 누군가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칸딘스키와 마그리트의 그림 앞에서 저는 빈 캔버스를 떠올렸어요. 캔버스를 마주하고 무엇을, 어떻게 그릴지 상념에 잠긴 사람을. 한글 창을 앞에 두고 우물쭈물하다가 골똘한 생각에 빠져드는 제 모습이 겹쳐졌어요. 마그리트가 했던 “모든 사물은 크게 비명을 지른다”나 칸딘스키가 했던 “색은 영혼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힘이다” 같은 말이 머릿속에서 웅성대고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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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관람이 ‘경험’임을 깨닫게 해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구겐하임미술관이었어요. 소라의 껍데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 같았지요. 나선형 구조를 거슬러 올라가며 만끽해야 하는 전시 형태는 꼭대기에는 뭐가 있을까 궁금하게 만들었어요. 전시를 관람하는 사람들의 속도를 저도 모르게 신경 쓰고 있었어요.그림을 보고 옆으로 이동하는 일은 위로 조금 올라가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거기서 작품을 보는 나만의 리듬이 만들어지는 듯했어요. 중간중간 쉴 곳이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었습니다. 단순히 육체적으로 힘들어서 쉬는 것은 아닐 거예요. 물론 빙빙 돌아가는 경험에 어지러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쉴 곳에서도 머릿속은 분명 분주할 테니까요. 그곳은 마치 ‘내가 방금 무얼 본 거지?’라는 질문이 ‘나는 영혼의 한 형태를 목도했어!’라는 깨달음으로 바뀌는 장소 같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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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정취를 느끼고 있는 오은과 장난스런 꼬마 © 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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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박물관, 휘트니미술관 등에서 원 없이 많은 것들을 보았어요. 동행하는 이의 표정을 살피면서, 서로의 리듬을 존중하면서 관람하니 갈등이 불거질 이유도 없었지요. 그리고 그날이 왔습니다. 프릭 컬렉션에서 전시하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The girl with a pearl earring)>(1665 ~1666)를 보는 날이었어요. 미국의 유명한 철강 사업가 헨리 프릭과 그의 자녀들이 수집한 소장품을 전시하는 곳인데, 렘브란트 반 레인과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이 많다고 들었어요. 원래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이 공사를 하게 되어 공사 기간 동안 해외 유수의 미술관에서 돌아가며 전시하기로 했다고 해요. 도착해서 보니 줄이 100미터 이상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그림 한 점을 보기 위해 이렇게 많은 이들이 한 공간을 찾는다는 사실이 놀라움을 자아냈습니다. 안전상의 이유로 공간에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을 제한해두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들었지요. 다행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한 시간이 아니지요. 함께 두근거리는 시간이지요.
프릭 컬렉션에서 놀랐던 점은 작품들이 저택 안팎에 전시되어 있기 때문에 생활에 스며든 예술의 분위기가 한껏 느껴졌다는 거예요. 그것은 사치라기보다는 여유였어요. 나만 소장하고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지요. 물론 여타의 미술관처럼 입장은 유료였지만, 공간 자체의 미장센은 다른 미술관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건물 내에는 ‘가든 코트(Garden court)’라 불리는 정원도 있는데, 연못과 분수, 조각상 등이 어우러져 색다른 즐거움을 안겨주었습니다. 소장되어 있는 페르메이르의 <연주를 중단한 소녀(The girl interrupted at her music)>(1658~1661)를 보고<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러 걸음을 옮겼습니다. 세상에나! 생각보다 그림이 훨씬작았어요. 가로 39센티미터, 세로 44.5센티미터 크기의 그림을 보기 위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이곳을 찾은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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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표정을 살펴봅니다. 고유 의상을 입은 인물을 묘사한 회화를 가리켜 흔히 트로니(Tronie)라고 하는데, 이는 이 소녀가 페르메이르가 상상 속에서 길어 올린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암시하지요. 살짝 옆모습을 하고 관람객을 빤히 바라 보는 눈매에는 온기와 다정이 가득하지만, 종래에는 표정 안에 내재된 사연을 각자의 자리에서 상상하게 만들어줘요. ‘영혼을 믿으세요?’라고 묻는 듯한 입매를 따라 움직이면 귀에 걸린 진주 귀걸이가 보여요. 빛에 알갱이가 있다면 그것들을 한데 그러모은 듯 귀걸이는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빛의 끝에는 어떤 신비로운 질문이 남지요. 문득 인생의 도처에 흩뿌려진 무수한 비밀들을 선선히 발견하고 싶어졌어요.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을 살폈어요. 입가에 알 듯 말 듯한 미소가 어려 있더라고요. 그 미소를 해석하고 싶었어요. 해독하고 싶었어요. 어떤 대상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은 다 엇비슷할 거예요. 상대를 알고 싶어 하는 욕망, 그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어 하는 욕망이 마음을 시종 반죽하듯 두드릴 테니까요. 사랑은 한곳을 바라보면서 때때로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같이 있으면서도 각자의 형태를 잃지 않는 것이니까요. 서로를 의식하면서 함께, 동시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어도 사랑은 남습니다. 그때 거기에 그대로 있을 겁니다.
뉴욕에서 저는 표정을 살피는 법을 배웠습니다. 여행에도, 연애에도 후회는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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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미술관에서 만난 ( )
우리는 흔히 미술관을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이라 여깁니다. 내 맘을 뒤흔드는 무언가를 마주치길 기대하며 그곳으로 향합니다. 물론 그 무언가가 ‘작품’일 거라 장담할 순 없습니다. 수많은 명작과 여백 사이를 헤매던 도중, 우연히 시선이 멈춘 곳에서 큰 울림을 느낄 수도 있을 테니까요. 미술관에 간다는 건 결국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걸 보러 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번 ‘P.S 미술관에서 만난 ( )’ 시리즈에서는 미술관을 구석구석 느끼다가 의외의 장면 앞에 오래 서 있던 분들의 경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시선을 멀리 두고 공간을 넓게 둘러보세요. 사람, 작품, 공간 자체, 주변을 감싸는 자연... 전부 다 영감이 될 수 있답니다. 애정을 담아 한 발짝 다가서 본다면, 신경을 곤두세우고 감각해본다면 더욱 다채로운 경험을 하게 될 거예요.
#01 P.S 미술관에서 만난 (사람들), 전혜림 에디터
#02 P.S 미술관에서 만난 (바다), 오은재 에디터
#03 P.S 미술관에서 만난 (자연), 박선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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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오은재 DESIGNER 제민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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