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눈잡이*가 된 나는 미술관에서 아주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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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참새 bak chamsae
가상실재서점 Virtual Bookstore 모이 moi의 북 큐레이터, 가끔 쓰고 많이 읽는다. 때때로 당신의 말을 듣는 인터뷰어, 그렇게 듣고 읽은 것을 전하는 팟캐스터이기도 하다. 시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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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만난 ( 양눈잡이* )
- 미술관에서 나는 양눈잡이*가 된다.
* 이 글에서 사용된 ‘왼눈잡이’와 ‘양눈잡이’라는 표현은 이훤의 시집 ‘양눈잡이’(아침달)에서 인용 및 변주된 것이다. 내게 또다른 새로운 세계를 알려준 이훤 덕분에 미술관에서의 양눈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에게 무척 고맙다.
그림과 나 사이에 어떠한 거리도 없었던 때가 있습니다. 만지려면 만질 수도 있었습니다. 김환기, 유영국, 천경자, 이우환, 이름 석 자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그들의 그림을, 내가 무턱대고 만질 수 있을 만큼 우리 가까울 수 있었던 때가 있습니다. 그때의 거리 없음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아름다운 것인지 깨닫기까지에는, 조금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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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도 없이 김환기의 그림 앞에서 얼쩡거렸었다. © 박참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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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의 뒷면을 본 적 있습니다. 미술관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시작한 사회생활이라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때의 나는 작은 것일수록 더욱 크게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내게 그런 눈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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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의 풍경은 결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의 뒷면이 너무나도 생생했습니다. 생생합니다. 이쪽이 위쪽이라는 다소 귀여운 표시와, 자신의 이름을 영문과 한문으로 표기하고, 작품 이름과 작업 연도를 적어두었습니다. 작품의 크기는 이렇고, 어떤 물감으로 그렸는지도 역시 적혀있었습니다. 화가가 직접 그린 그림에 직접 남긴 캡션이었던 셈이죠. 그때까지만 해도 작품의 뒷모습을 상상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들이 남긴 앞면의 영혼에 압도되어서, 뒷면 같은 것은 생각해볼 여유도 없었던 아이처럼요. 하지만 수장고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만난 그 그림의 뒷모습은 제게 새로운 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그림 앞에 서면 종종 양눈잡이*가 되었습니다. 그치만 어떤 사실은 너무 소중해서 금방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때의 나는 작은 눈으로 큰 것을 보느라 무척 바빠서, 내가 그림과 함께 양눈잡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얼마간 까먹은 듯했습니다.
나는 오래도록 그 미술관에 있으면서, 그림들을 온몸으로 만났습니다. 함께 아주 가까이 서서 관객을 바라보기도 했고, 마주선 채로 동등하게 있기도 했으며, 곁에서 그들의 보호를 자처하기도 했습니다. 너무나 거리낌 없이 다가오는 관객들을 막아서기 위해, 내가 그들 사이의 거리를 상기시켜주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여기서 더 나아가면 안 된다고, 그림과의 우리 사이에는 지켜져야 할 거리가 있다고. 하지만 내게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더욱 그림 가까이 갔었습니다. 아주 많은 그림과 나는 가까웠습니다. 누구의 어떤 그림이었는지 일일이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이요. 미술관에서의 일을 그만둘 때 즈음에는, 나는 모든 것이 지겨워졌었고, 그림과의 거리 없음도 조금 무서웠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영혼인 동시에 자본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때때로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계속 가까이 머물다가는, 내가 아주 중요한 것을 까먹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한동안은 미술관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았습니다. 미술관의 모든 풍경을 그만 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매번 전시가 끝날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양의 폐기물들, 그것을 치우고 버리자 마자 새로이 만들어지는 벽과 구조물들, 또다시 그것의 반복. 무한한 반복. 무엇을 위해 반복되는지 모르는 반복. 나는 조금 두려웠습니다. 한동안 미술관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살 만하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그때는 무언가를 보지 않으면 질식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는데, 오히려 보지 않으니 더욱 괜찮아지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책을 조금 더 많이 읽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 가까워진 것과의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도 종종 미술관을 찾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여행을 떠나면 곧장 낯선 도시의 미술관을 가장 먼저 둘러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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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본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우측 하단에 양 눈을 뜨고 봐야만 볼 수 있는 그의 서명이 있었다. © 박참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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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아주 멀리 지내는 시간이 미술관에서 그림과 아주 가까이 지내던 시간과 비슷해지던 때, 갤러리 현대는 개관 50주년을 맞아 아주 큰 전시회를 개최했습니다. 익숙하고 멋진 이름들이 많았습니다. 수장고에서 본 그들이었는데, 우리 아주 참 가까웠었는데, 생각하며 갤러리로 들어섭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림이 너무 멀리 있었습니다.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양 눈이 다 흐려질 만큼 멀리 있었습니다. 나는 당장에 슬퍼져서 그림을 오래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같은 그림을 옆에서도 뒤에서도 볼 줄 알았던 그때가 생각나서요. 너무 많은 그림을 아주 멀리서만 봐야 했던 그곳을 나오며 문득 내가 본 캔버스의 뒷면을 떠올렸습니다. 내게는 너무나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던 그 그림의 뒷모습을 잠깐 상상해보았습니다. 아마도 무언가를 휘갈겨 넣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 나와 그림 사이의 거리 있음이 조금 더 이상하고 유별나게 느껴졌습니다. 절대로 좁혀질 수 없는 거리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날을 기점으로 연달아 여러 전시장과 미술관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미술관에서 근무할 때, 저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주었던 사람에게 나는 연락했습니다. 그때가 너무 좋았던 거라고, 나는 몰랐다고, 그런 시간과 기회와 장소를 내게 주어서 정말 감사했다고. 우리는 아마 서로 모르게 조금 울었을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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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고맙다고, 내게 양 눈을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 박참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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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볼 수 없어서 다행인 것들도 있지만 기어코 보여서 더욱 아름다운 것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요. 그림의 양면을 모두 볼 수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감사하고 눈부시게 느껴졌습니다.
이제 나는 모든 그림의 뒷면을 상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만 아는 무언의 기호를 새겨넣었을 화가를 상상하면서. 그들이 남긴 이면의 자국들을 볼 수 있는 권리도 권한도 이제는 내게 없지만, 볼 수 없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있다는 것을 아니까요. 믿으니까요. 필시 그들은 무언가를 남겼을 것입니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 해도. 그래서 나는 그림 속에서 양면을 보게 됩니다. 보려고 합니다. 글을 쓸 때 나는 왼눈잡이*이지만, 잘 모르는 것을 볼 때면 혹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때면 양눈잡이*가 됩니다. 반드시. 충분히 보아도 못 보는, 안 보이게 되는 다른 면의 세계를 상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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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을 스케치하던 사람과 그를 바라보던 수많은 어린이들, 그리고 내가 오래 보던 그림을 함께 오래도록 보고 있던 사람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양 눈으로. © 박참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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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양눈잡이*가 된 나는 미술관에서 아주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림의 뒷면을 닮은 모든 것을 봅니다. 캔버스의 측면, 구석진 자리에 남겨둔 화가의 서명, 하나의 그림 앞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머무르는 사람들의 실루엣,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스케치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모든 뒷모습. 너무나 아름답고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 그 뒷모습. 뒤의 모습들. 그것은 그림만 본다면 볼 수 없는 어떤 이세계異世界의 형상입니다. 나는 양 눈을 번갈아 가며 그림이 아닌 세상을 볼 수 있게 될까요? 그것은 모를 일이지만, 그림 안에 충분한 실마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양 눈을 감고 캔버스의 앞과 뒤를 마음껏 상상해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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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미술관에서 만난 ( )
우리는 흔히 미술관을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이라 여깁니다. 내 맘을 뒤흔드는 무언가를 마주치길 기대하며 그곳으로 향합니다. 물론 그 무언가가 ‘작품’일 거라 장담할 순 없습니다. 수많은 명작과 여백 사이를 헤매던 도중, 우연히 시선이 멈춘 곳에서 큰 울림을 느낄 수도 있을 테니까요. 미술관에 간다는 건 결국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걸 보러 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번 ‘P.S 미술관에서 만난 ( )’ 시리즈에서는 미술관을 구석구석 느끼다가 의외의 장면 앞에 오래 서 있던 분들의 경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시선을 멀리 두고 공간을 넓게 둘러보세요. 사람, 작품, 공간 자체, 주변을 감싸는 자연... 전부 다 영감이 될 수 있답니다. 애정을 담아 한 발짝 다가서 본다면, 신경을 곤두세우고 감각해본다면 더욱 다채로운 경험을 하게 될 거예요.
#01 P.S 미술관에서 만난 (사람들), 전혜림 에디터
#02 P.S 미술관에서 만난 (바다), 오은재 에디터
#03 P.S 미술관에서 만난 (자연), 박선영
#04 P.S 미술관에서 만난 (표정), 오은
#05 P.S 미술관에서 만난 (음악), 김모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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